Congress of Vienna

나폴레옹의 퇴진은 유럽 각국의 전통 지배세력을 빈에 모이게 만들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하면서 각국을 프랑스에 편입시켜 국경선을 없애거나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경선을 새로이 조정하거나 원상 복귀시키기 위한 작업은 필연적이고 이 작업은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의 주도 하에 빈에서 열렸다. 이 모임은 ‘빈 회의’라고 불렸으며 보수적 복고주의, 전통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1814년 9월 1일에서 다음 해 8월 9일까지 열린 이 회의의 목적은 나폴레옹 전쟁의 혼란을 수습하고, 유럽의 상태를 전쟁 전으로 돌리는 것이 목표였다. 즉, 프랑스 혁명 이전의 유럽의 왕정 체제를 다시 보수하고 유지하는 것이 목표였다. 더불어 프랑스에 대한 견제도 중요한 목표였다. 그건 다시 나폴레옹 때처럼 프랑스가 강국이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나폴레옹을 물리친 주요 세력, 즉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영국 등 4대 열강이 회의의 실권을 장악하였고, 빈 회의가 시작된 지 2개월 만에 부르봉 왕정의 프랑스가 '4대 열강'에 끼어 4대 열강은 5대 열강이 되었고 이 5대 열강 위원회가 빈 회의를 실질적으로 움직였다. 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은 25년 전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이 결국은 공포, 전쟁, 재앙을 가져왔다고 의견 일치를 보고, 만장일치로 프랑스 혁명정신인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운동을 철저히 막고, 정통주의 원칙에 따라 각국의 영토와 지배권을 혁명 전의 상태로 돌려놓기로 결정했다. 그로 인해 프랑스 혁명으로 몰락한 부르봉 왕가를 프랑스에 복귀시키고, 에스파냐에서도 합스부르크가를 복귀시키는 등 왕정이 몰락한 곳에 다시 왕정을 부활시켰다. 빈 회의의 결과로 19세기 중엽까지 유럽 정치의 큰 틀이 되는 빈 체제가 형성된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을 통해 자유를 맛본 유럽의 민중들은 빈 체제로 인해 다시 전제 정치에 시달리게 되자 자유를 되찾기 위한 운동을 벌인다. 독일의 학생 조합 운동(부르센샤프트 운동),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자유주의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또, 빈 체제에서 독립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동맹국에 의해 분할된 이탈리아에서는 자유주의에 민족주의가 결합하여 카르보나리 당을 중심으로 통일 운동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런 운동들은 빈 체제를 이끌었던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의 탄압을 받아 실패로 돌아간다.
왕과 귀족들만의 이익을 고려하고 국민의 이익은 도외시하였으며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린 빈 회의는 비판가들의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을 겪고 난 뒤에 많은 사람들은 견제와 균형의 원칙을 내세워 패전국에 가혹하지 않고 유럽을 하나로 보아 조화를 이루어 나가려던 이들 보수주의 정치가들의 입장을 새로이 높게 평가하고 있다.